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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달트리 자서전 조각2번역 2020. 5. 20. 22:49
그냥 새 글로 이어서 쓰기로 했어
(로저가 1965년 더후에서 쫓겨났던 사건에 대해)
아마 당신은 내가 밴드에서 쫓겨났던 사건에 대해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만든 밴드에서 말이다. 몇 사람 정도 이 이야기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건 내 버전의 이야기이고 가장 진실한 이야기일 거라고 내 인생을 걸고 맹세한다. 아니, 정정한다. 피트의 인생을 걸겠다. 왜냐면 이건 오십 년은 지난 이야기이고 내 기억 속에서 한두 가지 디테일들이 섞여버렸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유럽 투어중이었고 모든 것이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일부는 밴드의 잘못이 아니었고 일부는 당연히 밴드의 잘못이었다. 그 달 초에 우리 장비를 몽땅 싣고 있는 밴을 Battersea Dogs Home 밖에서 도둑맞았다. 퍽 아이러니한 일이다. 우리 로디 Cy가 거기서 우리 밴의 보안을 강화할 겸 저먼 셰퍼드를 구할 수 있는지 알아본 적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투어를 위해서 장비를 대여해야만 했는데 그것들은 계속해서 뭔가 문제가 생겼다. 키스와 피트가 부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Holland에서의 첫번째 공연은 그런대로 잘 돌아갔지만 Holland와 덴마크 사이 어딘가에서 그들이 퍼플하트(마약)가 가득 담긴 봉지를 구했다. 그렇게 된 것이다. 연주는 아주 창밖으로 날아갔다. 박자는 계속해서 빨라졌다. 통제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난장판이었다.
우리는 1965년 9월 26일 일요일에 덴마크 Aarhus에 도착했고 공연장은 5000명의 열 받은 덴마크 농부들로 가득했다. 밴드가 두 번째 곡을 반 정도 연주했을 때 관중들 사이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의자들이 부서지고 병들이 날아다녔다. 곧 그것은 공연장 전체를 뒤집어 놓는 폭동으로 변했다. 그게 아마 우리가 했던 것 중에 가장 짧은 공연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다음날 조간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지만 우리는 이미 Aalborg의 다음 공연으로 옮겨간 뒤였다. 거기서 마침내 모든 것이 드러났다. 아마 그들이 했던 약과 신경 문제가 합쳐진 결과였겠지만 어쨌든 공연은 난장판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가사를 지키고 목소리를 충분히 크게 내려고 애썼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더 크게 더 빠르게 연주할 뿐이었다. 그것은 불협화음이었고 뭐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나 재능이 넘치는 뮤지션들로 이루어진 밴드고 뭐고 전부 변기에 쓸려내려갈 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거 말고 다른 걸 변기에 내려버리기로 결심했다.
밴드가 My Generation의 마지막 부분에 무대를 때려부수고 있는 동안 나는 무대에서 뛰어내려 가서 곧장 탈의실에 있는 키스의 여행가방으로 돌진했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이 짓거리들을 한 번에, 전부 끝내버릴 거야. 그가 숨겨둔 것을 찾는 데는 5초면 충분했다. 알약들로 가득 찬 그 위대하고 커다란 봉지는 그의 옷가방에 들어있었다. 블랙 봄버. 퍼플 하트. 당신도 알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많은 것들을 전부 변기에 넣고 내려버렸다.
당연히 키스가 나를 쫓아서 무대에서 내려왔다. 알약을 꺼내려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무슨 짓을 한거야? 씨발 무슨 짓을 한 거냐고?'
그래서 나는 그에게 내가 그것들을 변기에 내려버렸다고 했다.
그는 분노했고 탬버린에 달린 벨들로 나를 공격했다. 음, 그가 손에 들고 있었던 게 그것밖에 없었던 게 나한테는 잘된 일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꼭지가 돈 키스와 그의 끊임없는 공격에 마주해 있었고, 맞서 싸웠다. 그렇게 끔찍한 싸움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싸움이었고 내가 그걸 끝내버렸다. 다음날 우리는 집에 갔다. 나는 키트의 사무실에 불려 갔고 내가 더 이상 더후의 일원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이 이후에 로저 없이 공연을 했지만 잘 안 돌아갔고 로저한테 돌아오라고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로저랑 나머지 밴드 멤버들은 서로 몇 가지 조건을 걸고 다시 밴드가 되었는데 그 조건에는 로저가 폭력 쓰지 않기, 다른 멤버들이 공연 전에 약하지 않기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저에게 걸린 조건을 이용해서 특히 엔티랑 키스가 엄청 성질을 긁었다고 하네요. 이들 사이가 회복되는 데는 거의 2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눈물이 나네요. -역자
키스 서핑갔다가 죽을 뻔한 일화(1967년 미국 투어)
모두들 키스와 함께 여행을 다니는 삶은 웃긴 일로 가득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본다면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제발로 일어나서 그의 장난질 중 하나를 맘껏 펼쳐놓을 수 있을 때면 그것은 미친 듯이 웃기긴 했지만 그런 경우는 오직 모든 경우의 20프로에 불과했다. 나머지 경우에는 장난질, 폭발, 파괴들 뿐이었고 다른 한편에는 언제나 그걸로 인해서 퍽 비참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이번 투어의 마지막은 9월 9일의 호놀룰루 공연이었는데 이 공연은 까딱했으면 우리가 키스와 함께하는 마지막 공연이 될 뻔했다. 아마 당신은 많은 공연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공연은 특별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키스는 서핑을 하러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보드와 수영 팬츠를 챙기고 나갔다 올 거라고 말했다. 그는 런던 북부 웸블리 출신이다. 그는 서핑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 사실이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의 인생 계획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는 웸블리의 침실 벽에 세 장의 포스터를 붙여놨었다. 첫 번째는 포드 우디 자동차 앞에 서서 서핑보드를 들고 서있는 여자 포스터였다. 두 번째는 비치보이스였다. 세 번째는 스티브 맥퀸이었다. 그는 웸블리에서 머릿속으로 그의 인생을 설계했다. 그리고 세상으로 나와서는, 실행했다.
키스는 우리가 하와이에 갔을 시점에 그 중 절반 정도는 해치운 후였다. 그는 일 년 전에 킴 캐리건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Leicester 출신이긴 하지만 꼭 캘리포니아 서핑 걸 같은 여자였다. 또한 그는 이미 비치보이스와 친한 친구였다. 또 몇 년 후면 스티브 맥퀸의 옆집으로 이사할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해변에 당도했으니 그는 꼭 '서핑'을 할 예정이었다.
사실 아직도 그때 그가 살아남은 것이 신기하다. 다른 쪽으로 결론이 나기 쉬웠단 말이다. 왜냐하면 키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웸블리 놈이었고 파도가 그냥 들어오는 게 아닌지 어쩌는지 하나도 몰랐으니까. 키스는 거친 파도나 그 밑에 있는 날카로운 산호나 그런 것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서 그는 블루라군(영화랩니다)에 나오는 크리쳐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피를 철철 흘리고 반쯤 익사한 상태로 인생 리스트에서 또 하나를 지웠다는 거에 신이 나서는 말이다.
(바로 이어서 그 유명한 폭발 짤이 나온 쇼)
그러고 나서 우리는 CBS에서 'The Smothers Brothers' Comedy Hour'을 찍고 집으로 돌아갔다. 대중에게 홍보할 마지막 기회였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번 키스에게 감사를 전해야 한다. 우리는 'I Can See For Miles'와 'My Generaion'을 연주하고 마지막에 키스가 연막탄을 터뜨리기로 되어 있었다. 오후에 리허설이 있었고 모든 것은 괜찮게 흘러갔다. 많은 의논을 거친 끝에 스튜디오의 폭발 담당 진행 요원은 정해진 폭발물의 양에 만족했다. 하지만 키스는 아니었다.
리허설과 본방송 사이에, 그리고 브랜디의 첫 병과 두번째 병 사이에 키스는 진행 요원을 매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더 큰 폭발을 원했다. 그게 그의 인생의 모토였고 아무것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티비 생방송이라고 해도 말이다.
결과적으로 발생한 폭발은 나를 몇 피트 정도 앞으로 날려버리면서 온 무대를 먼지와 연기로 뒤덮었다. 생방송 송출도 몇 초 정도 방해했다. 키스는 폭발의 진앙지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지만 팔만 베이고 탈출할 수 있었다. 피트는 폭발의 여파를 고스란히 다 받았고 다음 몇 초 정도를 그의 불붙은 머리카락을 수습하고 그가 살아서 다시 청력을 되찾을 수 있을지 염려하며 보냈다. 20분쯤 지나서 그렇게 되긴 했지만 완전히는 아니었다.
달추리 찜 될 뻔한 일화
(The Who Sell Out 앨범 커버 촬영할 때의 일화입니다)
내가 촬영하러 나타났을 때 스타들을 주로 찍는 사진작가 데이빗 몽고메리가 말했다. '베이크드 빈으로 가득 찬 욕조 안에 좀 앉아볼래요?'
나는 그랬지. '알았어요.'
그들은 나한테 그 줄무늬 빅토리안 스타일 수영복을 입히고 빅토리안 스타일 깡통 욕조에 앉혔다. 그러더니 네 통의 거대한 하인츠 베이크드 빈을 꺼내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들은 냉장고에서 막 꺼내온 것이라 미친듯이 차가웠다. 꽝꽝 얼어있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간신히 그 상태를 모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십 분쯤 지났을까, 나는 덜덜 떨기 시작했고 그들은 두 줄짜리 전기난로를 가져와서는 욕조 바로 뒤편에 놓아주었다. 오 분쯤 지났을까, 이번에는 무지막지하게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뒤쪽에 있는 베이크드 빈을 앞쪽으로 옮겨주었어야 했다. 마치 평범한 욕조에 들어가 있을 때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 생각을 못 했다.
그 안에 한 45분 쯤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맹세하건대 끝날 때쯤에는 내 엉덩이 주변에 있던 콩들은 푹 익어있었다. 그렇게 나는 퇴근했고 나참, 폐렴에 걸렸다. 익어버린 엉덩이를 하고 벌벌 떨고 있는 꼴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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